고쿠라 번주였던
호소카와 다다오키공의 다도가마로서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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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 Wikipedia
아가노야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문록, 임진왜란) 때 초치된 이조 도공/존해가 개조이며, 고쿠라 번주 [호소카와 다다오키]공의 다도가마로서 개요했습니다. 존해는 지명을 따서 아가노 기조 다카쿠니로 이름을 바꾸고, 리큐칠철의 한 사람인 산사이(호소카와 타다오키) 기호의 격조 높은 다도를 계속해 헌상합니다.그 후, 존해는 번주의 이봉에 따라서, 히고 쿠마모토로 이동하였지만, 토토키 마고자에몬과 사위 와타리 큐자에몬이 아가노에 남아, 신번주가 된 오가사와라가의 아래에서, 사라야마혼가마에서 아가노야키를 계승해, 지금까지 잇게 되었습니다.
上아가노야키의 초창기 가마의 입 가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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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 Wikipedia
가마의 입 가마는 아가노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노보리가마입니다. 41미터의 높이는 일본에서도 최대급의 규모였습니다. 지금은 대나무와 초목에 의해 침식을 많이 받아, 주변의 공방터나 주거지와 함께 문화재 보호의 조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다도와 기독교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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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통문화인 다도의 작법 중에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있으며, 공통점이 몇 가지 존재합니다.하나는 기독교와 다도가 퍼진것이 거의 같은 시기였다는 것. 센노리큐의 일곱 명의 수제자 "리큐 칠철"의 타카야마 우콘, 마키무라 효부, 가모 우지사토 는 기독교인이며, 후루타 오리베, 호소카와 타다오키도 기독교인이었을꺼라고 말해지고 있습 니다. 타다오키의 아내 호소카와 가라샤는 유명한 기독교인으로, 타다오키가 가라샤의 추도를 위해 고쿠라에 세운 교회 안에는 다실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도에 영향을 준 기독교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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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
마와시노미(돌려 마시기)(농차)
센노리큐가 확립한 마와시노미(돌려마시기)(농차)는, 인원수만큼 들어간 차를 조금씩 마시고, 다음 사람한테 넘깁니다.타인과는 일정한 거리감을 두는 일본 문화에 있어서, 이것은 이례적이지만, 하나의 찻잔을 모두가 공유하는 것으로 "가치관을 공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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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 Wikipedia
기독교
최후의 만찬
또 기독교의 마지막 만찬에서는 빵을 '예수의 몸', 포도주를 '예수의 피'로 여겨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모두가 "하나의 가치관을 공유한다" 를 위한 가장 중요한 행위로, 센노리큐는 이 생각을 다도에 반영시켰습니다.
다도에 영향을 준 기독교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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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
니지리구치(다실의 작은 출입구_
엄한 상하관계가 있던 당시의 일본에
있어, 칼을 지녀서는 지나갈 수 없는
작은 입구인 니지리구치로 들어가게
하는 것으로, 다실에 있는 사람은 모두
평등한 환경을 만들었습니다.이것에
의해, 신분의 차이를 뛰어 넘어, 가치
관을 공유하기 쉬운 장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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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 Wikipedia
기독교
좁은 문으로 입장
"좁은 문으로 입장"이란 재산이나 지위, 명성, 무기 등 이 세상의 물건을 가진 채 천국의 문 은 통과할 수 없으며, 이를 모두 벗어던진 자야 말로 "좁은 문"을 통과해 천국으로 이어지는 좁 은 길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다도에 있는 "니 지리구치"는 이 개념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습니다.
400년전 가마터에서 출현한 마스크의 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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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포메트?
(유명한 기독교 악마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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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자 중 한 명)
가마솥의 입가마터(1602~1632)에서 3개의 마스크 도편이 같은 장소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동양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용모나 머리 세 개의 뿔이나 턱수염등에서, 예언자 모세와 천사 미카엘, 악마 바포메트가 아닐까 하고 예상합니다. 기독교의 우화를 바탕으로 동일한 기체에 부착되어 있어, 뭔가 선교사를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닐까 예상됩니다. "재판은 신만의 것" 이라고 해도 당시의 위정자로부터의 엄격한 탄압에서의 마음의 구제를 나타내는 그릇이였을지도 모릅니다.
신부와 아가노의 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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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가라샤
인용: 전국무장연구회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내 가라샤는, 오사카에서 스페인 신부 그레고리오·데·세스페데스와 만나 세례를 받습니다.가라샤의 사후 정중히 장례를 한 분도 이 신부였습니다.타다오키는 이 은혜로, 신부를 고쿠라성 아래에 몰래 숨겨주었습니다.고쿠라 성 아래에는 번주가 즐기는 가마라는 불리는 사엔바 가마가 있어, 아가노에서 종종 도공을 불러와 작도하였습니다.타다오키는 신부를 위해 교회를 세웠고 그 안에는 다실까지 있었습니다.그런데 거기서 사용되었을 다도구는 어디서 만들어진 걸까요?
아가노 주변 기독교 유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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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야마 하야토(기독교)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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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라고 그 지방에 전해지는 크루스 연못”
아가노 마을보다 더 가까운 곳에 타다오키의 측근이자 우수한 중신이었던 카가야마 하야토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야토의 순교 이후 그의 딸(그녀도 기독교인)의 칩거지에 추선되었습니다. 또한 크루즈 연못에서는 기독교 관련 유물이 발굴되고 있으며 주변에 많은 숨은 기독교인들이 조용히 살았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아가노 주변 기독교 유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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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에가 행해졌던 코가니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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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야마 하야토의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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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꿈치에서 윗부분이 착탈 가능하게 만들어진 마리아관음상?
코가니사에서는 후미에가 행해졌습니다. 후미에란, 에도막부가 당시 금지하고 있던 기독교의 신도를 색출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그림을 밟게 한 수법입니다. 또 팔꿈치에서 윗부분이 없는 목각의 관음상은 어린 시절의 예수를 안은 마리아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